그 기쁘신 뜻을 위하여(엡1:5)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벧전1:16)

말씀의 제목: 머리 둘 곳이 없는 교회

본문: 마8:18-22

그리스도께서는 회개하고 돌이키는 자들의 모든 불치병들을 다 고쳐주셨다. 그러므로 자신의 죄를 자백하고 나음 얻기를 원하는 자들은 모두 그리스도께 나왔다. 그러나 자신의 죄를 끝까지 붙들고 있는 자는 불치병을 가지고도 오히려 숨어버렸다.

그런데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자들이 있었다. 즉 그리스도 앞에 나와 나음을 얻으려면 자신의 죄를 회개해야 한다. 하지만 회개치 않으려면 그리스도께 나오지 않고 숨어버리면 된다.

그러나 많은 자들이 그리스도께는 나오되 자신의 죄를 회개하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오직 자신의 썩어질 그 육의 깨끗함만을 원했다. 영혼이 깨끗함을 얻어 자신이 아버지와 바른 관계를 맺는 것도 원치 않았다. 아버지의 뜻인 거룩과 거룩한 자들을 위한 거룩한 육체의 생명을 원치 않았던 것이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자들은 그리스도 당시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일곱 교회시대에도 있었고 이 마지막 때도 차고 넘치고 있다.

그들은 육신의 질병을 가지고 오직 병원과 은사를 행한다는 자들만을 찾아 다닌다. 그리고 정신병을 가진 자의 가족들은 오직 귀신을 쫓는 자들만 찾는다.

또한 자신의 불의와 죄를 가지고도 끝까지 그리스도 앞으로 나오지 않는다. 눈에 보이지 않는 흑암의 영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자신의 불의와 죄 가운데서 말하길 나는 거듭났으니 모든 죄에서 구원받았다고 하는 것이다.

게다가 병을 고치며 귀신을 쫓는 은사를 행하는 자들은 더한다. 사람을 모으며 많은 자들을 이끄는 것은 원하지만 아버지의 뜻인 거룩은 이루고자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은사를 행하는 자신을 찾은 자들에게 마음속 깊은 죄를 회개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에서 마음을 떼고 오직 아버지께만 그 마음을 드리고 아버지의 뜻인 거룩에 애써야 함도 말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그들은 많은 사람들 앞에서 능력을 보이는 재미에 푹 빠져있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뜻을 원치 않는 그들의 은사가 누구에게로부터 온 것인지 어린아이라도 쉽게 분별할 수 있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자들이 그리스도께 수없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살고자 하는 마음이 없는 자들이 다가올 때는 언제나 피하셨다. 마8:18을 보자.

당시 질병을 가진 수많은 자들은 그리스도께서 모든 질병을 고치시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그 영혼들이 나음과 자유를 얻은 것은 자신의 죄와 불의를 회개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육신의 깨끗함은 그 영혼이 깨끗함을 얻을 때 덤으로 얻은 것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하시므로 나음을 얻은 자들이 이루도록 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그 건강한 육을 가지고 아버지의 뜻인 거룩에 애쓰도록 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어리석어서 보이지 않는 것은 믿지 않는다. 그러므로 수많은 어리석은 자들이 그리스도께 영혼의 생명을 얻는 것은 원치 않았다. 거룩한 육체의 생명을 얻는 것도 원치 않았다. 그리스도께 나와 오직 자신의 보이는 몸만을 깨끗케 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의 순전하지 못한 그 마음을 아셨다. 그러므로 생명을 원치 않는 그들로부터 떠나가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이처럼 다른 마을에 있는 살고자 하는 자들에게 생명을 주시고자 떠나려고 하셨다. 그런데 한 서기관이 떠날 준비를 하는 그리스도 앞에 나오게 된다. 마8:19을 보자.

이 마지막 때에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자들과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하는 자들이 참으로 많다. 그러므로 그들은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바쳐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하면서 목자와 선교사의 길을 걷는다.

그런데 어떤 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수많은 자들에게 설교한 것만을 기억한다. 그러므로 그들의 마음은 늘 수많은 자들을 모으는데 가있다. 그리고 그 대중 앞에서 설교하며 많은 자를 이끌기를 원한다.

그러나 그들이 깨닫지 못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그때나 지금이나 그 모여든 군중 가운데서 살고자 하는 마음을 가진 자는 몇 없다는 것이다.

또한 어떤 자들은 그리스도께서 병을 고치며 기적을 베푼 것만을 기억한다. 그러므로 자신도 그러한 능력을 얻기 원한다. 그리고 그 능력을 누군가에게 얻어 대중 앞에서 그 능력을 행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은 그런 능력을 행하며 아버지의 뜻인 거룩을 이루는 데는 관심이 없다. 많은 사람들이 눈에 보이는 이적을 보고 자신에게 몰려드는 것만을 꿈꾼다. 그러므로 그들의 마음은 오직 많은 사람들 앞에 자신을 나타내는데 있는 것이다.

반면 어떤 자들은 그리스도께서 고아와 과부와 가난한자들과 함께 하셨다는 것만을 기억한다. 그러므로 자신도 사회의 소외된 자들의 썩어질 육을 돕는 자가 된다. 그러면서 그들은 자신의 그 선행을 자랑스러워하며 상급을 많이 얻을 것을 꿈꾼다.

하지만 그들이 깨닫지 못하는 것이 있다. 그리스도께서 수많은 고아와 과부와 가난한 자들과 함께 하신 것은 맞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오직 아버지의 뜻인 의로움과 깨끗함을 자신 안에 이루기 원하는 자들과 함께 하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많은 일과 큰일과 선행을 보는 자들의 눈에 이상하게도 보이지 않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기를 부인하며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는다. 오히려 자기의 의를 드러내며 그 일들을 이루어간다. 심지어 혈기를 드러내며 그 일들을 이루기도 한다.

그들은 또한 자기를 부인하지 못하니 자기의 십자가를 지지도 못한다. 육의 필요와 욕심은 십자가를 지는 것을 방해한다. 이 세상의 영광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자기의 십자가를 지려면 모든 육의 필요와 욕심을 내려놓고 이 세상과 철저히 구별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들은 반대로 육을 위해 세상의 영광스런 길을 걷는다.

사람에게 가장 큰 고난은 자신의 마음속 불의와 죄의 뿌리를 끊고 거룩에 이르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처음부터 고난 받는 것과 땀 흘리는 것을 원치 않았던 자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또한 그리스도를 따라 그 고난스런 길을 걷지 못한다.

게다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는 마지막에 그리스도처럼 자신의 살을 찢고 피를 흘려야 한다. 하지만 그들은 고통과 두려움이 있는 그 육의 죽음도 원치 않는다. 그러므로 자신의 살을 찢어 피 흘려야 하는 그 죽음이 기다리는 십자가의 길을 끝까지 따르지도 못한다.

행여 그런 자들이 살과 피를 드린다 해도 아버지께서는 그것을 받지 않으신다. 아버지께서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받으신 것은 그가 흠 없고 거룩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구든 그리스도처럼 살과 피를 드리고자 하는 자는 그 마음과 생각과 입술과 행위가 거룩해져야 한다.

당시 그리스도께 나온 서기관이 바로 이런 자였다. 그는 참으로 속마음이 악한 자였다. 그는 예전부터 그리스도를 좇아 다니며 그리스도를 지켜보았다. 그런데 그는 그리스도를 따르고 보며 그리스도가 왕이 될 때 자신도 그 왕 자리에 함께 앉기를 원했다.

당시 서기관의 자리에 앉은 자는 바리새인이나 장로로 올라갈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서기관은 자신이 서기관에서 그 두 자리 중 한자리로 올라갈 수 없음을 이미 예측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그 자리와 명예를 얻지 못할 바에야 그리스도께 붙는 것이 자신에게 유익이 있을 것이라는 마음을 품었다.

그 서기관은 그러한 악한 마음을 품고 그리스도 앞에 나왔다. 그리고 그 마음을 숨기고는 그리스도께서 어디로 가시든 자신은 좇겠다고 말한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그 서기관에게 아무런 답변을 하지 않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서기관이 자기 사람이 아님을 아셨기 때문이다.

그 서기관은 그 뒤로도 따르겠다는 말을 하며 계속 그리스도를 좇아 다녔다. 그러나 얼마 못되어 그 길이 고난의 길이요 이 세상의 영광을 주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므로 그는 그리스도를 좇지 못하게 되었다.

그는 또한 자신의 짐작대로 결국 장로나 바리새인도 되지 못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어디를 가든 따르겠다던 그 서기관은 생명도 얻지 못하고 또한 사망으로 들어가는 이 세상의 명예도 얻지 못했다. 이처럼 십자가를 보지 못한 그의 눈에서는 모든 것이 다 사라져버렸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의 계획하심을 따라 오직 열한제자를 택하셨다. 그러나 한 명은 자신 스스로 제자가 되겠다고 하며 그리스도께 나왔다. 마치 그 서기관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나왔던 것이다. 그의 이름이 바로 가룟유다였다.

이 서기관의 말이 마쳐지자 그리스도께서 택하시지 않은 그 제자가 나섰다. 가룟유다는 나서서 ‘사람들은 더욱더 몰려들고 이제 그리스도도 피곤하시고 따르는 사람들도 피곤하니 쉴 곳을 찾아야 합니다.’고 말했다.

가룟유다는 그리스도를 따르며 끝까지 육의 욕심과 필요를 내려놓지 못한 자였다. 그래서 그는 늘 육적인 것을 통하여 자기의 사람들을 고르고자 했다. 자기의 사람들을 고른다는 것은 이런 뜻이다.

사람은 육적인 선함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누군가 육적으로 불쌍한 사람을 보면 그를 돕기를 원한다. 그리고 자신의 것을 진심으로 내어서 어려운 사람을 도우면 그는 육적으로 선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 육의 선함은 영원한 것이 아니다. 사람의 육은 결국 사망으로 들어가 썩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육의 선함이 아닌 영적인 선함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늘 육신이 힘들고 어려워도 사람들이 영원한 생명을 얻기 원하셨다. 그리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돌이키는 자에게 생명도 주시고 육적인 질병도 고쳐주시어 거룩에 애쓰도록 해주셨다. 또한 사람들도 그 영의 선함을 택하기 원하셨다.

그런데 사람들은 영의 선함보다는 육의 선함을 더 바란다. 왜냐하면 육의 선함은 지금 당장 유익을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사람들은 육의 선함을 베푸는 자를 더 인간적이고 착하게 본다. 육의 선함은 눈으로 똑똑히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이런 자가 썩어질 육의 선함을 좇는 자이다. 어떤 사람은 배고픈 사람에게 늘 떡을 주고자 한다. 또한 선교지에 늘 돈과 육을 위한 약과 육을 위한 물건을 보내고자 한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그가 선하게 보인다.

또한 떡과 물질과 약을 주며 ‘먼저 육을 살리고 복음을 주어야 한다.’ 혹은 ‘육이 살아야 복음을 받을 수 있다.’라고 말한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의 귀에는 그것이 합리적으로 들린다. 그러므로 그것이 진리인줄 알고 자신도 육을 살리는 그 일에 동참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선함과 이름을 드러내는 것을 즐기며 그 육의 선함을 좇는 자들이 깨달아야 할 것이 있다.

사람은 육적인 고난과 고통가운데서 오히려 영이 살기를 원한다. 하지만 육이 살고 나면 오히려 영적인 생명을 내 팽개쳐 버리는 게 사람이다. 그러므로 육의 선함은 사람을 사망으로 이끄는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가룟유다가 바로 이런 선함을 가지고 있었던 자였다. 즉 육을 위해 영의 생명을 내팽개쳐버리는 어리석은 선함을 가지고 있었던 자가 바로 가룟유다였다.

그러나 육적인 선함은 썩어질 것이며 영적인 생명을 얻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가룟유다에게 십자가와 반대되는 그 육의 선함에서 돌이키라고 늘 은유적이고 비유적인 말씀을 주셨다.

그러나 가룟유다는 그리스도를 좇으며 자신을 끝까지 돌이키지 않았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따르면서 육의 선함으로 사람들을 대했다. 그러니 육의 욕심과 필요를 원하는 자들은 그리스도가 아닌 가룟유다를 따르게 되었다.

가룟유다는 늘 이런 식으로 자기의 사람들을 골랐던 것이다. 그리고 영의 선함이 아닌 육의 선함을 가진 자들은 자연스레 그리스도의 말을 듣지 않고 가룟유다의 말을 듣게 되었다.

마음이 악한 그 서기관이 말을 마쳤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가룟유다는 곧 자신의 육의 선함을 내세웠다. 사람들이 계속 밀려들어 힘들게 하니 자신을 따를 자를 고르기 위해서 이제는 쉬자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육의 이익을 얻고자 하는 가룟유다에게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마8:20을 보자.

그리스도께서는 가룟유다가 이 비유적인 말씀을 통하여 깨닫고 돌이키길 원하셨다. 또한 가룟유다처럼 육의 선함을 가지고 따르는 모든 자들도 돌이키기를 원하셨다.

그리스도께서 가룟유다에게 주신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앞날에 있을 일에 대한 예언의 말씀이었다.

모든 짐승들과 또한 사람들도 자신의 죽음을 준비한다. 그러므로 짐승들은 죽을 때가 되면 자기가 자라 온 곳을 찾아 들어가 자기의 죽음을 맞이한다. 또한 찾아 들어가지 못할 때는 그 머리를 자신의 굴과 거처를 향하고 죽는다.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죽을 때가 되면 자기의 가족과 친척과 친지를 찾는다. 그리고 자신이 자라 나온 곳에 육신을 묻는다. 이처럼 모든 짐승과 사람들은 죽을 때가 되면 자신의 머리 둘 곳을 찾는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가룟유다에게 자신은 머리 둘 곳이 없을 것임을 알려주셨다. 즉 자신의 죽음이 어떠할지를 깨닫게 해주셨던 것이다. 그리고 그 예언의 말씀대로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를 받으실 때 실제로 머리 둘 곳이 없으셨다.

그리스도께서 육신의 죽음을 당할 때 제자들은 다 도망갔다. 그리고 그 육신의 어미도 오직 죽을 때에 찾아왔다. 게다가 육신을 장사한 그 굴도 자신이 마련하신 것이 아니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과 짐승들처럼 모든 준비를 하지 아니하셨다. 모든 육의 것들을 죽는 순간까지 오직 하늘의 아버지께 맡기셨다. 그리고 자신은 끝까지 십자가의 죽음만을 이루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죽음은 아버지의 뜻만을 이루신 참된 죽음이었다.

교회는 머리 되신 그리스도만을 따르는 그리스도의 지체들이다. 그러므로 교회도 초대교회로부터 지금까지 그리스도와 똑같은 삶을 살다 육의 죽음을 맞이한다. 교회도 죽을 때 그 머리 둘 곳이 없으며 준비하지도 않는다는 뜻이다.

교회는 짐승들이 뜯어먹었으니 장사할 육신이 아예 남지 않았다. 불로 태움을 당했으니 역시 육신이 남지 않았다. 그리고 돌과 몽둥이로 때리고 톱으로 켜서 죽이고 들판에 뿌렸으니 짐승의 먹이가 되었다.

그러므로 교회는 죽음의 순간에 그 머리 둘 곳이 없으며 준비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교회가 죽을 때 머리 둘 곳이 없는 것은 마지막 때의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우선 한 가족가운데 죄의 뿌리를 끊어내고 영과 혼과 육이 흰옷을 입은 자녀들은 모두 들림 받는다. 그리하여 공중에서 신랑을 맞이하고 그리스도와 같은 거룩한 몸을 얻는다. 그러므로 들림 받는 교회는 머리 둘 곳을 준비할 이유가 없다.

또한 흰옷을 입고 남은 가족들은 목 베임을 당한다. 그런데 먼저 간 가족들은 모두 혼인잔치에 참여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 목 베임 당한 자들에겐 장사를 치러줄 가족이 한 명도 남아있지 않다. 이처럼 환난복음을 선포하고 거룩한 피를 뿌린 그들도 역시 그리스도처럼 머리 둘 곳이 없게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이처럼 가룟유다에게 육의 선함에서 돌이키라고 직접적으로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오히려 자신의 앞날을 알리시므로 그가 스스로 깨닫고 스스로 그 마음을 돌이키기를 원하셨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통하여 가룟유다는 그리스도께서 머리 둘 곳이 없는 것처럼 제자인 자신도 머리 둘 곳이 없을 것임을 깨달았다. 또한 그리스도께서는 이번뿐만이 아니라 그 십자가의 길과 마지막이 어떤 것인지 여러 번 알려주셨다.

그러나 여러 번의 기회를 받았지만 가룟유다는 끝까지 기회를 거부했다. 자신의 마음을 돌이키지 않았던 것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죽을 때 육신이 거할 곳이 없을 것임을 분명히 말씀하셨다. 그러나 이 마지막 때에도 가룟유다와 같은 육적인 선함으로 복음을 전하려는 사람들은 어리석게도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한다.

그러니 그들은 이 말씀을 보고 그리스도께서는 가난하셨으며 그러니 거할 처소가 없었다고 말한다.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육의 선함을 드러내는 가룟유다에게 말씀을 마치시자 또한 제자가 다음과 같은 말을 하게 된다. 마8:21-22을 보자.

마태는 말씀을 기록할 때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는 다 제자라고 했다. 그러므로 마태는 12제자도 제자요 그리스도를 따르는 다른 사람들도 제자라고 기록했다.

그러나 누가는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해도 열두 제자 외에는 제자라고 하지 않았다.

이러한 배경으로 자신의 부친을 장사하게 해달라는 요청을 한 제자는 12제자가 아닌 자로서 그리스도를 따른 사람이었다. 그러나 마태는 그가 그리스도를 따르기에 12제자가 아니라도 제자라고 한 것이다.

이 요청을 한 영혼은 그리스도께 순종은 했지만 마음에는 의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 그리스도를 따르면서도 주 예수는 아버지의 아들이요 창조자요 그리스도라는 것과 그리스도를 통해 거룩해지며 거룩한 육체를 입는다는 것에 의심이 있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그처럼 연약하여 의심의 마음을 가진 자도 불쌍히 여기셨다. 왜냐하면 그가 의심이라는 연약함에 있으나 순종하며 따르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은 그리스도를 따르다 자신의 부친이 육신의 죽음을 당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당연히 세상 사람들처럼 장사하고 돌아올 것을 요청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는 말씀을 주셨다. 의심가운데서도 순종하며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하는 자들에게 주신 이 말씀의 뜻을 두 가지 면에서 깨달을 수 있다.

첫째 생명이 없는 자가 생명이 없는 자에게 생명을 줄 수 없다. 그러므로 사람이 영혼이 떠난 사람의 육신을 장사한다고 하여 그 영혼을 다시 불러올 수 없다. 또한 그 썩어질 몸을 벗어난 영혼에게 거룩한 육체를 줄 수도 없다.

사람의 생명은 오직 생명의 근원되신 아버지께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엄마의 배속에서 처음에 입고 나오는 육신도 아버지께서 계획하신 것이며 두 번째 얻게 되는 거룩한 육체도 아버지께서 직접 지으시는 것이다.

이처럼 사람은 생명을 주는 자가 아니라 생명을 얻는 자이다. 그러므로 생명이 없어 생명을 줄 수 없는 사람이 사망으로 들어간 육신을 찾아가 장사한다 해도 아무런 것을 해줄 수 없는 것이다.

게다가 살아있는 사람을 찾아가 생명을 전한다 할지라도 자신이 진리를 알지 못하면 그것도 헛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이 먼저 거룩한 진리를 깨우쳐야 한다. 그래야 아직 육신의 생명이 있는 자들을 만났을 때 생명의 진리를 전해줄 수 있다.

둘째 죽은 자를 장사하는 것은 산 자가 하는 것이 아니요 그를 삼킨 자가 하는 것이다.

원수는 사람의 영혼을 심판하지 못한다. 그러나 사람들의 육신의 사망권세는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그 사망권세로 그리스도의 육도 사망으로 이끌었던 것이다.

그런데 영혼이 떠난 몸은 죽은 것이다. 그리고 오직 썩어져 흙으로 돌아가니 아무런 쓸 데가 없다. 그러나 원수는 영혼이 떠난 그 쓸모 없는 육신을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사용한다.

이와 같이 죽은 사람의 몸을 자기가 원하는 대로 악하게 사용하는 것은 바로 원수가 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죽은 사람의 몸을 장사하는 것은 산사람이 해야 할 일이 아니라 이미 사망으로 들어간 원수가 하는 일이다.

그러나 아버지께서는 거룩한 자의 육신은 원수가 사용하지 못하도록 막으신다. 그러니 원수는 그 거룩한 것을 만지지도 못한다.

이 두 가지의 이유로 인하여 아직 육신의 생명이 살아있는 사람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오직 진리를 허락하시는 그리스도만을 따라야 한다.

그래야 자신이 먼저 생명의 진리를 얻어 아직 육신의 기회가 있는 자들에게 그 거룩한 생명의 진리를 전할 수 있다. 또한 사망으로 들어간 자신의 거룩한 육신을 그 더럽고 악한 원수가 장사하지 못하게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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